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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랑(SAINT LAURENT) 명품 역사 이야기

by Re.V B.STORY

생로랑(SAINT LAURENT)

생로랑(SAINT LAURENT) 명품 역사 이야기

이브 생로랑은 1961년 이브 생로랑과 그의 연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 그리고 미국인 사업가 맥 로빈슨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브생로랑의 역사를 이야기하면 그것은 그대로 이브생로랑과 피에르 베르제의 역사로 바꿔도 될지도 모릅니다.
생로랑 로고
그리고 또 한 사람 이브 생로랑이라는 브랜드를 말하는데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에디 슬리먼입니다. 우선은 이브 생로랑이라는 디자이너가 어떻게 메종을 열게 되었는지 그것부터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에디 슬리만을 데리고 이브 생로랑과 디올의 관계를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는 것도 알게 될 거예요.

메종 '이브 생로랑'이 생길 때까지

입생로랑은 1936년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보험회사에 다니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비교적 부유한 중산층 자녀였습니다. 17세에 파리로 이주해, 파리의 패션 디자인 학교에 입학합니다.

이미 이 무렵부터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고, 경쟁자가 되는 훌륭한 디자이너들과도 절차탁마하는 시대입니다.왜냐하면 3개월의 코스가 끝날 무렵에 행해진 IWS 주최의 디자인 콩쿨에 칵테일 드레스를 응모해, 최우수상을 획득해 버렸습니다. 게다가 이 칵테일 드레스를 봉제한 것은 지방시이고, 코트 부문의 수상자는 그 펜디, 샤넬로 황제로까지 불리게 된 칼 라거펠트였습니다.
입생로랑
그리고 이 콩쿠르가 계기가 되어 VOGUE의 디렉터였던 미셸 드 브뤼노프가 이브를 크리스찬 디올에게 소개하면서 디올과의 만남이 되었습니다. 디올은 이브의 재능에 감명을 받아 곧 후계자로서 육성을 시작했습니다.

1954년에 크리스찬 디올에 들어간 이브입니다만, 3년 후에는 크리스찬 디올이 급서해 버렸기 때문에, 1958년, 약간 21세라고 하는 젊은 나이로 크리스찬 디올이라고 하는 당시는 나는 새를 떨어뜨릴 기세였던 거대 메종의 주임 디자이너가 되어 버렸습니다.

평소 같으면 무거운 압박에 짓눌릴 법한 가운데 이브는 트라페즈 라인이라는 치맛자락 라인이 무릎에 딱 걸칠 정도의 대형 디자인을 발표했고 다음날 신문에는 입생로랑은 프랑스를 구했어요. 위대한 디올의 전통은 계속됩니다라는 제목이 춤을 추는 등 큰 호평을 받았고 이어 니먼 마커스상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메종 입생로랑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60년 알제리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에 징집되어 디올을 떠나게 됩니다. 사실 징병 뒤에는 디올의 소유주였던 마르셀 부사쿠가 움직인 적도 있었습니다.

웬일인지 브사크는 이브를 싫어했던지 디올이 또 다른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던 마르크보앙을 주임 디자이너로 만들기 위해 이브를 전쟁에 보내고 그 사이에 이브를 해고하고 마르크보앙을 주임 디자이너로 취임시킨 것입니다.

이브는 군대 내에서 왕따를 당하는 일까지 있어, 마음을 앓아 정신병원에 수용되기까지 지칠 대로 지쳐버렸습니다.

입생로랑(YSL)의 설립

어떻게 보면 마르셀 브삭에 의한 디올의 해고는 이브에게는 잘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1961년에 연인 피에르 베르제와 자신의 메종인 「이브·생로랑」을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자금면에서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미국의 실업가 맥 로빈슨의 원조도 있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천재로 불리며 모드의 제왕이 된 이브 생로랑의 쾌진격이 시작됩니다.

1965년 몬드리안룩

네덜란드 추상화가 피에트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흰색 미니 원피스를 수직과 수평으로 넣은 라인으로 분할하고, 분할된 각각의 영역에 빨강, 노랑, 파랑의 3원색을 대담하게 도입한 디자인입니다. 예술과 패션을 융합시킨 훌륭한 디자인으로 생로랑의 유례없는 재능을 세상에 알리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1966년 스모킹

남성용 턱시도를 어레인지하여 쿨한 여성용 정장으로 완성시킵니다. 날씬하고 스타일리쉬한 스타일은 이브 생로랑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이어져나갑니다.
스모킹
스모킹이라는 이름은 턱시도와 동의어로 원래 식후 흡연 시에 입었던 가운에서 턱시도가 나온 것이 어원입니다.

1968년 시스루

시스루는 지금은 당연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지만, 속살이 비치는 시스루를 최초로 발표한 것은 이브 생로랑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1968년 사파리룩

사파리룩도 원래 사냥때 남자가 입는 옷을 여성용 정장으로 개량하고, 단추가 아닌 끈을 사용하여 벨트로 허리를 조이는 것으로 여성적인 라인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파리
후세까지 생로랑에서 종종 사용되는 스테디셀러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1968년 판탈롱

팬츠 스타일의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판타롱입니다. 밑단dl 넓으며 여성용 스타일로 바지를 정착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터부로 여겨지고 있던 것에 도전한 결과로서 서서히 미니·스커트로 바뀌는 새로운 스타일로서 쌀을 중심으로 해 침투해 갔습니다.

격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생로랑

이브 생로랑의 활약은, 패션 업계에 항상 놀라움과 감동을 줄 만한 훌륭한 것이었습니다만, 기업으로서의 이브 생로랑은 1990년대에 들어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1993년의 사노피·보테사에 의한 매수입니다. 2000년 전후는 마침 브랜드 인수전이 한창이던 시기로 베르나르 아르노가 이끄는 LVMH(루이비통 모에 헤네시)와 구찌 소유 PPR(피노 플랜탕 르두트) 등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격동의 시기
그런 탁류 속에 이브 생로랑도 말려 들어가 버린 거죠. PPR에 의해서 사노피·보테가 매수되어 오트쿠튀르 이외의 프레타포르테 라인의 리브·고슈, 프레그런스나 코스메틱을 취급하는 이브·생로랑·보테는 PPR의 산하에서 있던 구찌 그룹에 들어갑니다. 입생로랑은 오트꾸뛰르와 함께 PPR의 직하 조직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1 년 리브 고슈의 디자이너로 구치를 재생시킨 디자이너로 유명한 톰 포드가 취임하는 것입니다. 2002년에는 이브 생로랑 본인도 은퇴를 발표하고, 이브 생로랑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인물이 있을 리도 없이 오트쿠튀르는 이브의 은퇴로 폐쇄하게 됩니다.

2003년에는 톰 포드도 리브 고슈의 디자이너를 사임해, 2005년에 아르마니, 프라다와 건너 걸어 온 스테파노 필라티가 후임되어, 2012년까지 디자이너를 맡게 됩니다.

스테파노 필라티에 의한 재건

스테파노 필라티는 밀라노에서 태어나 패션의 중심으로서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원래 목표로 했던 측량사의 길을 포기하고 셀티의 인턴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3년에는 조르지오·아르마니의 남성복 부문의 어시스턴트로서 채용되어 1995년에는 프라다의 패브릭 부문의 개발 담당자가 되어, 소재에 대해 깊은 조예를 얻게 됩니다.
스테파노 필라티
프라다의 자매 브랜드인 MiuMiu의 어시스턴트·디자이너로 승격해, 프라다의 여왕 미우챠·프라다의 아래에서 여성, 남성복의 담당을 해 왔습니다.

그런 필라티가 이브 생로랑에 들어온 것이 2000년이에요. 불과 2년 후인 2002년에는 이브 생로랑의 모든 디자인을 총괄하는 디렉터가 되어 톰 포드의 사임을 받아 2004년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취임하게 됩니다.

이브생로랑의 신격화된 빛, 에디 슬리만의 강렬한 개성에 비하면 눈에 띄지 않는 인상이 있지만 2004년 취임 이후 2012년 퇴임까지 8년간 이브생로랑의 정상으로서 지휘를 맡았으며 구찌그룹 인수와 이브생로랑의 은퇴 등으로 브랜드 가치가 하락했던 이브생로랑의 재건을 도모하며 더욱 컨템퍼러리한 럭셔리 브랜드입니다.

역사를 바꾸는 에디 슬리먼

2012년에 8년에 걸쳐, 이브·생로랑을 지지해 온 스테파노·필라티가 퇴임해, 그 후임으로서 크리에이티브·디렉터의 자리에 앉은 것이 에디·슬리만입니다.

사실 에디 슬리먼은 사노피 보테에 매수된 후인 1997년부터 남성 라인의 아티스틱 디자이너로 수년간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 에디가 남성, 여성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돌아왔습니다. 에디 슬리만이라고 하면 2000년부터 디올 옴므의 디자인을 다루며 전설이 된 컬렉션을 발표해 사회 현상을 일으킬 만큼 인기를 얻은 디자이너입니다.
에디 슬리먼
또, 스테파노·필라티의 후임으로 소문이 났던 것이, 에디·슬리만 이외에도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이 질·썬더의 디자이너를 맡고 있던 러프·시몬즈입니다.

무려 라프 시몬스는 존 갈리아노가 해고되어 공석이었던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에디 슬리만이 생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는 것과 같은 시기에 앉았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로랑과 디올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에디 슬리만이 행한 개혁의 하나로서 프레타푸르테의 브랜드 명칭을 이브 생로랑에서 「생로랑·파리」로 변경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브·생로랑에의 반기는 아닙니다.브랜드의 원점으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1966년 리브 고슈 창업 당시의 글꼴을 사용하고 있으며 YSL이라는 로고도 존속시켜 기업으로서의 입생로랑이라는 회사명도 그대로 입니다.

에디 슬리만의 록혼 넘치는 뉴테이스트 생로랑은 이브 생로랑이 남긴 브랜드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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